외경 Apocrypha/신구약 중간사외 외경

신구약 중간사외 외경

바이블엔명화 2016. 12. 4. 22:28




신구약 중간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리고 마카비

구약(말라기)과 신약(복음서)사이에 숨어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신구약 중간시대의 역사는 크게 바사(=페르샤 시대 B.C. 느헤미야, 에스라-331)

그리이스(= 헬라시대 B.C. 331-63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B.C. 323-198)
셀레우코스 왕조 (B.C.198-167)
*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피마네스) B.C.175-163
마카베오(마카비) 가문의 반란(B.C.167-142)
유다의 독립시대 (하스몬 왕조 B.C.142-63)
로마시대(B.C. 63- 세례요한의 탄생까지)의 약 400년간으로 나누어집니다.

비록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 400여년 동안에도 세계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었고 유다에도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마지막 역사적 기록은 다니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70년 동안의 포로기를 마치고 바사(페르샤)의 고레스(싸이러스) 왕으로부터 해방을 명령받아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건축하며 신앙을 활성화 시켰던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입니다. 또한 이 시기의 예언자로서는 학개와 스가랴가 있으며 이들보다 조금 늦게 마지막으로 말라기가 예언하던 시절은 B.C. 435년경으로 바사 통치의 중간 시기였습니다. 느헤미야 이후에도 유다는 정치적으로는 1세기 반 동안 바사의 지배를 받았지만 내정과 신앙은 거의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 기간 유다의 실제적 지도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정치적 책임을 진 대제사장이었습니다.(느헤미야 12:22) 그러나 이 대제사장은 다윗왕 때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이라고는 하지만 (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 바사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대제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경쟁과 음모가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백성들의 큰 칭송을 받았던 시몬과 같은 대제사장도 있었습니다.

한편 이 당시 유대인들과 갈등을 빚은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자기들만의 성전을 따로 그리심 산에 세웠고 사마리아 오경(모세 오경과 유사)이라는 그들만의 성경을 따로 편찬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

이 400년을 신앙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이스라엘이 페르샤, 헬라, 로마라는 세계 초강대국 사이에서 계속 지배당하면서도 그들의 믿음과 민족정신을 지킨 신앙의 투쟁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할만한 이름인 마카비 가문은 이 중간시대에 신앙을 박해한 외세에 결연히 맞서 독립을 쟁취해 낸 영웅적인 가문이었습니다.

B.C. 331년 대 제국이었던 바사가 그리스의 알렉산더(B.C. 331-323)에 의해 무너진 후 세계의 역사는 크게 움직이게 됩니다. 알렉산더는 아시아와 유럽과 인도까지 당시의 전 세계를 정복한 그리이스(헬라) 대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특히 그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헬라철학을 전 세계에 전파했고 인류최초의 올림픽과 아르키메데스 등 수학자, 예술가, 변론가 등을 양산하고 문화 예술의 놀라운 발달을 가져온 헬레니즘을 전파했습니다. 철학, 문화, 예술, 체육, 복장,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헬라문명은 이 당시 세계를 지배한 정신의 흐름이었습니다.
세계사의 정신적 흐름은 이 이후 인본주의(휴매니즘)인 헬레니즘과 신본주의인 헤브라이즘(히브리즘)의 갈등이라고 여겨질 만한 엄청난 문명사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 그리스 제국은 몇 개로 나누어지고 로마에 의해 다시 세계가 통일되지만 로마시대에도 로마어인 라틴어 대신 여전히 헬라어가 쓰여질 만큼( 로마 지배 시대에 있던 신약성경도 헬라어로 쓰여짐) 헬라의 정신적 영향은 그리스 로마 신화( 훗날 로마 신화와 연합 됨)가 되어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 제우스, 박카스, 비너스, 포세이돈, 나르시스, 헤라클레스, 아폴로 등)

구약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파의 갈등도 이 중간시대에 생겨난 헬라문화와의 갈등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식으로 이해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헬라의 문화를 그들의 믿음에 접속시킨 진보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분리하다라는 뜻으로 물들어 가는 헬라문명으로부터 율법적 신앙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 당시의 유명한 바리새 지도자는 힐렐 (Hillel)과 샴마이 (Shammai)였는 데 이들은 바리새파 성경해석의 거두였으며 탈무드의 형성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국수주의적인 기질은 로마시대에는 열심당(눅 6:15- 로마에 아부하는 이들을 암살하기도 했던 독립운동주의자들)으로 변화하기도 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 중 성경을 전문으로 필사하는 사람들이 생겨 그들을 서기관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대제사장 가문 출신이나 귀족출신 지식층이 많았던 사두개인들은 헬라 문명에 개방적이었고 정치지도자로 헬라에 친근한 대제사장을 밀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했으나 사두개인들은 헬라적 영향을 받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교리적 차이까지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이 되었습니다. ( 바울의 변론 행 23:1-10 )

알렉산더가 죽은 이후 대 제국은 알렉산더의 장군들의 권력투쟁으로 크게 네 조각으로 나누어집니다. 그 중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를 중심으로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나중 프톨레미 왕조를 점령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속에서 유다는 아래와 같이 중요한 변혁을 겪습니다.

1) 프톨레마이오스(톨레미) 왕조에게 지배되는 시기(B.C. 285-197)
2)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지배되는 시기(B.C. 197-167)
3)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시기(B.C. 167-142)
4) 유다의 독립시기(B.C. 142-63)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알렉산더의 장군중 한 사람이었고 이집트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톨레미 I세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톨레미 I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건설하는 등 알렉산드리아를 세계적 문명의 중심도시로 만들었고 비교적 유대인들을 호의적으로 다루었습니다. 톨레미 II세 치하 때에 알렉산드리아에 모인 지식층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만 알려진 구약성경을 당시 전 세계의 언어인 헬라어로 번역하고자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번역은 후에 '70인 번역'(LXX 셉투아진트)라고 알려진 것인데 이것은 히브리 경전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해 유대에서 왔다는 70인(정확하게는 12지파로부터 각각 6명씩 도합 72명)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이 톨레미 왕조가 또 다른 4강대국 중의 하나였던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III세에 의해 B.C. 199년 점령당하자 이때부터 유대는 셀류쿠스 왕조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잔학한 왕으로 알려진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 때 대 박해가 시작되었는 데 그것은 셀류쿠스 왕조의 마음대로 유대의 대제사장을 임명하는 것을 유대가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 신앙을 박멸해 버리고자 유대 역사에서 가장 잔학한 핍박과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 이 무서운 박해와 순교의 기록은 마카비서등 외경에 생생히 나타나 있습니다. 천주교는 마카비등 외경을 인정하여 공동번역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 신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건립되었고 제단에는 돼지 피를 뿌렸고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여 먹지 않는 자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B.C 167년 안티오쿠스의 사자들은 예루살렘 근처의 제사장 맛다디아에게 공개적으로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요구했으나 맛다디아는 이를 거절했고 겁이 많은 다른 유대인이 앞으로 나와 이방 제사를 드리자 격노한 제사장은 그 배교한 유대인과 안티오쿠스의 사자를 죽이게 됩니다. 유명한 마카비 독립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맛다디아는 그의 다섯 아들( 요한, 시몬, 마카비, 엘르아살, 요나단) 과 함께 약 25년 동안 대 제국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특히 셋째 아들 마카비는( '쇠망치'라는 뜻) 용맹이 뛰어났고 그의 전쟁기록과 형제들의 용맹한 전투는 외경 마카비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B.C. 164년에는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을 탈취하여 모든 우상을 숙청하고 구약성경의 제사법에 따라 8일간의 봉헌절( 수전절=하누카 절기)을 지켰습니다.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 이 절기는 신약에만 나타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修殿節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한복음 10:22) 성전은 모독당한 지 3년만에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맛다디아가 죽고 가장 용맹했던 마카비도 전사한 가운데 나머지 형제들이 전투를 지휘하여 계속된 이 투쟁 끝에 5 아들 중 마지막 생존자 시몬 때에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B.C. 142년까지 줄기찬 항쟁을 계속했고 드디어 항쟁을 시작한 지 25년만인 B.C. 142년에야 세금을 내지 않고 내정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시몬은 이 나라를 그의 조상의 이름을 따 하스몬 왕국이라 불렀고 하스몬 왕조는 시몬의 아들들이 나라를 다스리며 B.C. 63년 로마의 침공을 받기까지 100여년을 강한 독립왕국을 유지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 독립기간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마카비를 다윗왕에 못지 않은 유대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B.C 63년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합니다.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그리이스에 이어 다시 전 세계를 장악하고 B.C. 63년에는 예루살렘을 침공해 속국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로마는 이두매(에돔)출신의 안티파테르( 신약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헤롯의 아버지)를 유대의 분봉왕으로 세웠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는 바로 이 안티파테르의 아들인 헤롯왕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공간과 시간으로 제약된 이 현실 세상의 역사에 친히 제약을 받으시는 육신으로 오시게 됩니다.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신비는 인간의 현실과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게 됩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 3:1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갈 4:4)
B.C 5년 세례요한 탄생.....
B.C 4년 예수님 이 땅에 오시다.

< 중간 시기 참고> 외경 (外經 Apocrypha)에 대하여

중간 시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와 예언의 영감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기간에도 몇 가지 책들이 쓰여졌습니다. 이 책들을 외경(정경 밖의 책이라는 의미)이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현재의 성경 66권은 구약 39권은 A.D. 90년 얌니야 종교회의에서, 신약 27권은 어거스틴이 참석한 A.D. 397년 카르타고 총회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외경이란 B.C. 250년경부터 기독교 시대 초엽까지의 기간동안 쓰여진 것으로 히브리 정경에 들지 못한 유대의 문헌들을 가리킵니다. 즉 성경의 사도성, 보편성,영성, 영감성입니다.
이 책들은 쓰여진 사실성은 인정되지만 영적권위나 계시의 영감성이 결여되었다고 보여지는 책들입니다. 물론 이 판단은 결국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조심스럽고도 엄숙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책들을 정경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들이 있는 가운데 개신교(기독교)에서는 이 책들을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보았고 카톨릭 교회에서는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판단은 실로 신중해야할 작업으로서 지금까지의 연구로는 현재 66권의 정경의 선택이 성령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 판단의 영을 따른 가장 합당한 결정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한편 위경이란 분명 꾸며진 내용으로 판단된 책들입니다. 외경은 15권으로 분류됩니다. 공동번역성경은 에스드라 상하와 예레미야 서신, 므낫세 기도서를 뺀 외경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외경 목록 >

에스드라상(에스라), 에스드라하(에스라), 에스더 부록, 수산나(다니엘), 아자리아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다니엘), 벨과 뱀(다니엘), 유딧, 토비트, 바룩(예레미야), 므낫세 기도서, 집회서, 솔로몬의 지혜서, 예레미야 서신, 마카비상, 마카비하가 있습니다.

외경의 간략한 내용>

1) 에스드라상: 에스드라상은 에스라에 관계된 역사서로서 요시야 왕 (약 B.C. 621년)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유월절 축제에서 시작하여 에스라 (B.C. 444년) 시대에 율법의 공적인 낭독으로 끝나는 일련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에스드라하: 에스드라하의 주요 부분 (3-14장)은 바벨론에서 에스라에게 임한 일곱 계시를 자세히 묘사한 것입니다.

3) 토비트: 경건한 유대인 주인공 토비트의 이야기로 시력을 잃은 그를 위해 아들 토비마스가 믿음의 여행 끝에 물고기 쓸개로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시키는 이야기입니다.

4) 유딧: 마카비 혁명이 일어난 이후 유대 과부 여장부 유딧이 유대 베틀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로 들어가 그를 매혹하여 술에 곯아 떨어지게 한 다음 암살하고 도시를 구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5) 에스더 첨가서: 에스더서에 기도문,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추가된 부분입니다.

6) 솔로몬 지혜서: 잠언과 대단히 유사한 느낌을 주는 이 책은 물질주의, 우상숭배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7) 집회서, 또는 시락의 자손 예수의 지혜서: 무려 51장에 이르는 이 책은 역시 잠언과 같은 계열로서 에녹, 노아, 아브라함등의 신앙과 지혜를 설명하고 경건하게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8) 바룩: 예레미야의 친구이며 서기(렘 32:12)로 알려진 바룩에 의해 씌어진 바룩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자신들의 죄때문임을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로 시작하여 소망의 예언을 주는 결말로 구성되었습니다.

9) 예레미야 서신: 예레미야 11:10에 이어지는 부분으로서 우상숭배의 허무함을 가르치는 예레미야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0) 아자리아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 이 책은 풀무불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로서 다니엘서 3:23과 3:24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데 풀무 불이 격렬하게 타고 있는 고통의 시간에 아자리아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는데, 그때 하나님은 화염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불길을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풀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 노래는 시편 136편과 148편을 연상시킵니다.

11) 수산나: 다니엘 13:1-64절에 첨가되어 있습니다. 요아킴이라는 남편이 있는 수산나라는 정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하려다가 실패한 악한 두 장로는 오히려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수산나에게 사형선고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때 다니엘이 나타나 그녀가 어느 나무 밑에서 간음했느냐고 두 장로에게 따로따로 물어 보고 그들의 대답이 일치하지 않아 그 음모가 탄로 났으며, 두 행악자는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12) 벨과 뱀: 다니엘 14:1-42절에 첨가되었다. 벨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바벨론의 우상이지만 다니엘은 사제가 밤중에 몰래 벨이 산 것처럼 조작하는 것을 밝혀내고 한편 그들의 또 다른 신인 뱀을 다니엘이 죽여 처단하는 이야기입니다.

13) 므낫세의 기도: 역대기 33:19절을 보면 가장 악했던 왕 므낫세가 바벨론에서 회개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 사건이 나타나는 데 이 기도문은 그 므낫세의 회개기도를 기록한 것입니다. 대단히 경건하고 진지한 내용입니다.

14) 마카비상: 마카비상은 안티오쿠스 에피라네스가 시리아의 왕위에 오른 때(B.C. 175년)로 부터 마카비 일족 중 한 사람인 시몬이 세상을 떠난 때 (B.C. 135년)까지의 40년간 안티오쿠스에 대한 유대인의 저항과 결국 유대의 독립을 가져다 준 마카비 전쟁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안티오쿠스에게 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던 제사장 맛다디아의 세 아들, 유다 (3:1-9:22)와 요나단 (9:23-12:53) 및 시몬 (13:1-16:24)의 공적에 대한 기록도 담겨져 있습니다.

15) 마카비하: 마카비하는 유다 마카비의 공적보다는 신학적인 해석으로서 하늘의 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하나님의 주권적 주재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고, 특히 종말론의 교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